나영석PD의 인생을 바꾼 여행지 아이슬란드 

내 인생을 바꾼 여행지 (2) -나영석PD편

인생은 거대한 쓰나미다. 주도권을 놓치고 한 번 휩쓸리면 끝이다. 그 강렬한 흐름 속에 끌려가면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조차 잊게 된다. 그러다 작은 반전이 시작된다. 자신을 그 흐름에서 끄집어내고, 마치 관조하듯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인생을 내려다볼 수 있게 하는 '사건'은 아주 사소한 데서 솟아난다.

예능킹으로 통했던 1박2일 TV 화면.


무려 5년. 남들은 '청춘'이라며 흥분해 쏘다닐 때 편집실에 틀어박힌 채 끙끙대며 그 소중한 30대를 오롯이 프로그램 하나에 바쳐버렸다. '국민 프로그램'이라 불리며 여기저기서 상을 휩쓴 그를, 그 '인기'라는 쓰나미에서 꺼내놓은 것도 아주 작은 사건이었다. 

역시나 촬영을 끝내고 여느 때처럼 집에 들어갔는데, 어라 자신을 낯설어하는 네 살 딸. 아빠를 서먹해하는 아이는 그렇다 치고 길거리에서 사인 요청을 받는 남편이 창피해 아이와 함께 멀리 떨어져 걷는 아내는 또.

국민 PD 나영석. 5년간 예능 프로그램 '1박2일' 쓰나미에서 그를 콕 집어 들어 올려 놓은 건 이 '서먹함'이었다. 

별 게 없었죠. 정신을 차렸더니, 이시대 여느 가장들과 같았던 거죠. 서글픈 얼굴을 한 예비 중년의 전형.




가족뿐 아니라 손발이 척척 맞던 출연자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갔고, 지친 스태프들도 급기야 병원행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한 방전.

새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한다 해도 욕심에 겨워 또 주변 사람을 쥐어짤 테고, 시청률에 끌려다니다 보면 아, 인생도 어느새 말년이겠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 원해서 했던 일이나 좋아했던 일에 대해 생각해볼 틈도 없었던 거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온 지금의 지점. 그는 원래 느렸다. 사회라는 물살의 속도가 너무 빨라 나와 맞지 않았는데도 선생님, 부모님, 주변 사람들이 계속 물살 속으로 밀어넣었던 거다.

결국 짐을 쌌다. 머릿속을 관통한 생각은 딱 두 가지. '버둥거리며 내 시간을 바친 이 일이 돈벌이 수단일 뿐일까, 아니면 끈질기게 추구할 만한 삶의 목표인 걸까?'
이런 헷갈림 속에 덜컥 배낭을 꾸려 휴가를 감행한 곳은 아이슬란드. 막연했다. 머릿속엔 그저 '오로라'뿐이었다. '영혼의 샤워라는 오로라의 신비한 움직임을 보고 나면 뭐라도 해답을 얻지 않겠어?' 하는 간절함뿐이었다. 정말이지 그랬다. 여행을 떠나서는 오직 오로라만 생각하자. 회사를 관두든, 답을 찾아 

다른 길을 가든 결정은 그다음. 그렇게 도착한 아이슬란드에서 그의 넋을 빼앗은 것은 오로라가 아니었다. 이끼 덮인 초원이었다.

나영석 PD를 사로잡은 아이슬란드의 이끼덮힌 초원.




우주 행성 같은 이 미지의 땅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 질긴 생명력이라니. 

차를 세웠다. 내렸다. 카메라도 차에 둔 채. 그는 이 초현실적인 풍경들을 카메라가 아닌, 눈에, 가슴에 담기 시작했다. 언젠가 또 지치고 힘든 순간이 오면, 두고두고 0.1초 만에 바로 꺼내 보려고 말이다.

오로라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흐림, 비, 비, 또 흐림.'

헤매며, 헛물을 켜는 와중에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 그건 역시나 1박2일이었다.

1박2일 TV 화면.



모든 걸 떨쳐버리겠다고 20시간 비행기를 타고 먼 이국까지 날아왔건만, 민박집에서 이케아 냄비에 삼양라면을 끓이다 프로그램 시청률을 검색하는 그. 기념품 가게에서 만난 오로라 사진 밑의 'VARIETY'라는 글자를 보고 '버라이어티 정신'을 주야장천 외치던 강호동을 떠올렸던 그. 차라리 생각하다 보면 질리겠지 하며 그는 '1박2일'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복기했다.

그러다 귀국이 초읽기에 들어간 마지막 무렵, 오로라를 보고 만다.



떠나기 전에야 얄밉게 고개를 내민 오로라. 들숨과 날숨을 천천히 내쉬며 하늘거리는 오로라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 순간 그 저릿함이 머리를 쾅 친다. 그렇게 미친 듯 기다려서 만난 오로라의 그 저릿함. 그게 그렇게 그가 도망치고 싶었던 '1박2일' 연출 때의 그 저릿거림 같은 거였다.

인생의 해답을 줄 오로라를 찾아 몇천 Km를 날아왔는데, 답을 준 건 오로라가 아니라 가슴이었죠.



그의 머릿속이 고민덩어리에 짓눌려 있을 때 그의 가슴은 촬영 때의 쿵쾅거림과 두근거림의 저릿함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거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는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라는 책에 이렇게 쓴다. '일은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명령하는 것이다. 성공을 좇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두근거림을 좇아서 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나는 그동안 왜 잊고 살았을까. -다음 행선지는 결국 내가 정해야 하는 것.'

인생을 바꾼 아이슬란드 여행을 끝낸 뒤 그는 지금 시청자들에게 가슴 저릿한 두근거림을 찾아주는 '여행 프로그램'에 올인하고 있다. 누가 고민이 많다고 하소연하면 그는 가슴이 느끼는 여행을, '잠깐' 해보라고 답을 준다. 조금 쉬어 간다고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어차피 레이스는 기니까.


출처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044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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