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아나운서는 결혼을 앞두고 친구들로부터 “어쩌다 그런 남자와 결혼 하게 됐냐”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예비신랑은 2군을 전전하는 그저 그런 야구선수였다. 들어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이름이었으나 ‘병신’이라는 별명은 나름 유명했다. 당연히 실력은 별 볼 일 없었다.
그에 반해 이 아나운서는 꽤 잘나가는 축에 들었다.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갖고 있었고, 인지도도 높아 채널의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그런 남자’와의 결합은 “여자가 아깝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그래서 이 아나운서는 결심했다고 한다. ‘잘 사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겠다’고.
그녀의 결심은 1년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그 병신이 느닷없이 홈런왕에 오르더니 급기야 역사상 최초로 4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고, 2년 연속 50홈런, 단일시즌 최다 타점 등 기록을 쏟아내며 연말 시상식 단골손님이 된 것이다. 아내가 초라해질까 봐 야구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이름은 이제 모두가 다 아는 박병호다.
“힘들면 야구 그만둬. 내가 먹여 살릴게. 밥하고 청소 할 수 있지?”
박병호-이지윤 부부.
- 진주는 흙이 아니라 당신이 품고 있다
불과 4, 5년 전까지 박병호는 야구팬들에게도 다소 생소한 선수였다. 분명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도무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 수 없었을 정도로 경기에 나오지 않는 유령 같은 타자였다. 야구를 하며 돈을 받는 프로에서 철저한 실패자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의 야구인생에 처음부터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아니었다. 고교시절 초고교급 타자로 평가 받았던 박병호는 LG 트윈스에 연고지 우선지명으로 1차지명되며 기대를 불러모았다. 루키임에도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되며 파란을 예고했다. 그러나 ‘넓은 잠실의 외야를 넘겨버릴 타자는 박병호밖에 없다’던 LG의 기대는 실로 거기까지였다.
박병호는 그해 타율 .190 3홈런 21타점에 그치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고, 이듬해도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162 5홈런 13타점). 수많았던 대어급 고졸 루키들처럼 그의 이름도 혜성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프로치곤 다소 이르게 군복무를 마친 그는 절치부심하며 2009시즌을 준비했지만 마찬가지였다(.218 9홈런 25타점).
1할 거포이던 박병호의 LG 트윈스 시절. 당시 엑스포츠 중계화면 캡처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2군 성적이 좋아 1군에 올라오면 죽을 쒔고 어쩌다 날리는 공갈포로 연명했다. 그러다 다시 2군으로 내려가면 펄펄 날았다. 박병호는 2005시즌부터 2011시즌까지 LG에서 288경기를 출장했는데 이는 2군에서의 171경기보다 많았다. 그러나 차세대 거포는 통산 25홈런(2군에선 36홈런)을 날리는 데 그쳤다.
기회의 질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박병호는 1군에서 2군보다 117경기를 더 뛰었지만 타석에는 고작 38번 더 들어갔다(1군 749타석, 2군 711타석). 선발 출장한 타자가 최소 3타석 이상 소화한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그가 1군에서 잡은 기회의 대다수가 경기 막바지 대타 출장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반드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기회마다 박병호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LG는 그를 포기했다. 넥센 히어로즈와 트레이드를 한 것이다. 이는 2011시즌 트레이드 마감일인 7월 31일, 마감 시간인 자정을 3시간여 앞두고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작게는 한 남자의 인생이, 크게는 KBO리그의 역사가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진, 엑스포츠
- 믿음의 가치는 147억원?
당시 넥센은 LG 못지않게 암울한 팀이었다. 유일한 자립형 구단인 탓에 재정이 열악했으며, 유망주 현금 트레이드로 근근이 버티는 수준이었다. 이장석 구단주가 연일 선수를 팔아대자 팬들이 그의 이름에 빗대 ‘장석꾼’으로 부를 정도였다. 당연히 성적도 바닥이었다.
그래서 박병호의 넥센 이적은 그가 드디어 커리어의 종착역에 다다르는 것처럼 보였다. 트레이드 손익계산도 마찬가지였다. ‘LG는 골칫거리를 제거하는 대신 쓸 만한 투수 둘(송신영, 김성현)을 얻었고, 이 과정에서 넥센에 현금을 찔러주지 않았겠느냐’는 게 대부분의 관측이었다.
넥센 자체의 평가만 달랐다. ‘이긴 트레이드’라는 것이다(마지막에 밝히겠지만 ‘이긴 트레이드’란 말엔 엄청난 의미가 생겼다). 박병호에게 무조건 4번타자를 맡길 것을 천명하기도 했다. 프로 데뷔 이후 6년 동안 단 한 차례도 풀타임으로 출장한 적이 없으며, 홈런 9개가 커리어 하이인 타자에게 팀의 중심과 미래를 맡겼다.
그러자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트레이드 전까지 4개월 동안 홈런 1개에 불과했던 박병호가 이후 3개월 동안 12개를 몰아치며 폭발할 조짐을 보인 것이다. 이듬해인 2012시즌부터는 아예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독식하며 장기 집권 체제에 들어갔다. 단순히 리그 최다 홈런만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31-37-52-53개로 매 시즌 홈런 개수를 늘려나갔다.
LG에서 버림받은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박병호. 자료, KBO
자신감을 얻은 박병호는 질적으로 다른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2015시즌 박병호의 평균 홈런 비거리는 123.9m로 리그 최장거리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를 감탄시켰던 홈런은 비공인 비거리 159m(트랙맨 측정)가 기록됐고, 전광판을 넘기는 홈런은 일본에도 소개됐다. 특히 53홈런 중 절반에 가까운 25개를 원정에서 기록했다. 2014시즌엔 52홈런 중 원정 홈런이 17개에 불과해 ‘가장 작은 목동구장을 홈으로 쓰기 때문에 홈런 수에 덕을 봤다’는 평가절하를 당하기도 했던 그였다.
믿을 수 없는 변신을 단순한 발전이라고 하기엔 이전과의 갭이 너무 컸다. 그에게 부족했던 게 실력이 아닌 기회와 믿음으로 보이는 이유다. 공교롭게도 친정에서 버림받은 그해 결혼한 박병호는 아내와 처음 만났던 2군 시절에 대해 “나는 그녀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급이 아니었기 때문에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결혼 이후 절대적 신뢰를 등에 업은 그는 “아내가 나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성공을 다짐했다고 한다.
박병호가 2년 연속 MVP를 수상하던 장면.
왼쪽 시상자 구본능 KBO 총재는
LG 트윈스 구단주인 구본준 부회장의 형이기도 하다.
박병호와 LG, 그리고 트윈스는 이렇게 질긴 인연이다. 사진, 엑스포츠
그런 와신상담 덕에 LG는 2012년 연말 시상식에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소속팀 2군 선수였던 박병호가 MVP를 수상했기 때문이다. 그가 트로피를 드는 순간 객석에서 이를 지켜보며 미소 지었던 이지윤 전 아나운서의 표정은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란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고 있니, 친구들아.’ 사진, 엑스포츠
물론 그녀의 미소는 이듬해에도 볼 수 있었다. 박병호가 2013시즌까지 2년 연속 MVP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년 11월엔 MLB.com을 통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메이저리거가 된 박병호가 신인의 자격으로 미국에 가기 때문이다. 막연한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다. 그는 야구의 나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신부 친구들이 “어쩌다”라며 우려를 자아냈던 신랑감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다. 무명인 박병호를 만나고 단 한 순간도 미래를 걱정해 본 적이 없다던 그녀의 말처럼.(이 글은 ‘Destiny vs Dynasty’로 이어집니다.)
이긴 트레이드의 의미 △넥센은 박병호를 트레이드로 데려올 때 LG로부터 15억원의 뒷돈을 받았다. △이후 5년 동안 그에게 지급한 연봉은 16억원이므로 사실상 1억원만을 투자해 요긴하게 쓴 셈이다. △게다가 그는 메이저리그로 떠나며 147억원이란 거금을 넥센에 안겨줬다. △박병호의 원래 주인이었던 LG는 그를 보내고 송신영과 김성현을 얻었지만 송신영은 이후 FA 자격으로 넥센에 복귀했고, 김성현은 승부조작이 적발돼 영구제명됐다. 물론 LG는 15억원도, 147억원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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