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를 들끓게 만들었던 가상화폐의 열풍은 빠르게 식어 사라졌다. 모두가 외쳤던 가상화폐는 거품이 되어 사라졌고, 그 많은 가상화폐의 상당수는 사라지거나 이름만 남아있는 상태다. 하지만 민간의 투자가 주가 된 가상화폐 열풍을 지나 머지않아 대기업, IT 공룡 위주의 가상화폐 바람이 다시금 불 것이 예견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자사의 고유 가상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하려는 대기업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을 위시한 글로벌 IT 기업들은 물론, 라인, 카카오 등의 국내 IT 기업들도 연이어 가상화폐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플랫폼을 선보이고 있다.
제2라운드에 접어든 블록체인 기술
삼성전자의 갤럭시S10 라인업은 현재 판매량 고공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미려한 디자인, 선명해진 카메라, 더 빨라진 성능 등 갤럭시S10 시리즈는 혁신적이고 발전된 기능들을 담으면서, 전작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기록하게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제품이 담은 다양한 새로운 기능들 중, 아직까지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필요성이 소구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가 존재한다. 바로 ‘블록체인 키스토어’ 기능이다.
블록체인 키스토어는 블록체인 기반의 모바일 서비스를 사용할 때 할당되는 개인 키를 삼성전자의 보안 소프트웨어인 ‘녹스’를 이용해 안전하게 보관하는 서비스다. 삼성전자는 “개인 데이터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플랫폼”으로 블록체인 키스토어를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모든 개인 데이터를 포괄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간단하게 축약해 ‘가상화폐 지갑’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갤럭시S10의 블록체인 키스토어는 가상화폐 거래와 결제, 스마트 컨트렉트를 성사시키는 데에 사용되는 개인 키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설정 화면에서 삼성 블록체인 키스토어를 설정하면 이용자의 가상화폐 지갑이 생성되며, 현재는 이더리움만 지원되지만 앞으로 비트코인 등의 여타 가상화폐도 지원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녹스의 기능을 활용해 기기에 가상화폐 지갑을 탑재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 가상화폐, 암호화폐란 이미 오래전에 ‘사어(死語)’가 되었는데 말이다. 지금도 매스미디어에서는 가상화폐 투자를 통해 가산을 탕진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하고, 대중들은 전 세계적으로 폭락한 가상화폐 시세를 보며 조소를 날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삼성전자가 가상화폐 지갑을 단말기에 탑재한 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가상화폐 시장 제2라운드’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대기업들이 연이어 뛰어들고 있다
글로벌 ICT 기업들 중 가상화폐 시장에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기업으로는 단연 페이스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페이스북은 지난 2월, 블록체인 스타트업인 ‘체인스페이스’를 인수했다. 이들은 작년 5월 창업 15년 만에 가장 큰 규모의 조직개편과 인사이동을 단행하며 블록체인 전담팀을 신설했으며, 데이비드 마커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데이비드 마커스는 페이팔의 회장, 미국의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의 이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페이스북은 화폐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 달러에 고정된 스테이블코인을 개발하고 있으며, 내년에는 자사의 메신저 서비스인 왓츠앱의 송금 기능을 이용해 가상화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의 양대 인터넷 기업인 카카오와 네이버도 가상화폐와 관련된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카카오는 올해 상반기 자사의 가상화폐인 ‘클레이(Klay)’를 개발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현재 블록체인 관련 자회사, 관계사를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 3월 19일에는 자회사 중 한 곳인 그라운드X에서 자체 블록체인 메인넷 구성을 위한 ‘클레이튼 퍼블릭 테스트넷’을 공개한 바 있다. 향후 카카오는 클레이튼 퍼블릭 테스트넷을 통해 국내외 블록체인 시장 공략에 나설 예정이며, 자회사와 관계사들이 향후 적극적으로 카카오 플랫폼을 활용해 서비스를 제공해 나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네이버는 자회사 라인을 통해 가상화폐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라인은 작년 8월 ‘링크’라는 이름의 가상화폐를 발행했으며, 싱가포르에는 ‘비트박스’라는 가상화폐 거래소를 만들었다. 링크는 이용자가 라인의 댑(dApp, 탈중앙형 앱)을 이용하면 보상으로 링크를 얻는 구조를 적용했으며, 별도로 대중이나 투자자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의 가상화폐 공개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링크는 라인 서비스 안에서 결제에 사용할 수 있으며, 비트박스 거래소에서 거래도 가능하다. 현재 네이버는 다양한 블록체인 서비스를 내놓기 위해 라인 인력을 포함해 150여 명의 개발자가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의 노림수는 블록체인을 통한 생태계 구축
많은 기업들, 특히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를 영위하는 업체들이 의욕적으로 블록체인 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ICO, STO 등을 통한 서비스 업체들의 자금 조달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예시로 든 업체들은 당장의 자금적 곤궁함을 안고 있는 기업들이 아니기에, 자금 조달을 위한 블록체인 기술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자사의 서비스와 연계한 새롭고도 지속 가능한 ‘사업모델’을 마련하는 데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페이스북, 텔레그램 등의 글로벌 서비스 업체들이 준비하고 있는 메신저 연계 가상화폐 기술은 ‘송금’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외신 블룸버그는 페이스북이 전 세계 최대의 송금 시장이며 2억 명이 넘는 왓츠앱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인도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인도인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돈은 2017년 기준 약 78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페이스북은 왓츠앱 메신저를 통한 가상화폐 송금 서비스를 시작으로, 점차 이를 결제 서비스로 확대해 나갈 것이 전망되고 있다.
라인, 카카오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블록체인 플랫폼이다. 자사가 구축한 블록체인 플랫폼 위에 다양한 제휴사, 협력사들이 자체 서비스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생태계 순환을 도모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페이스북이 노리는 것처럼 가상화폐 이용자 확대와 이를 통한 ‘결제’의 확대로 이어지게 된다. 즉, 지금 블록체인 상용화에 뛰어든 IT 공룡들은 자사 블록체인 관련 서비스의 확대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결제 서비스의 확대와 자사 생태계 내에서의 커머스 순환 구조의 구축, 그리고 ‘금융 서비스 제공’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풀어낼 수 있다.
이제 미래를 대비한 논의를 나눠야 할 때
지금 준비되고 있는 블록체인 관련 서비스들은 탈중앙화를 부르짖었던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개인, 기업의 자발적인 참여로 거래가 이뤄지고 시장이 성장하는 것을 지향하던 기존의 시장과는 달리, 지금의 움직임은 서비스의 주체가 명확하다는 점 때문이다. 탈중앙화를 지양하고, 대신 효율적인 개발 주체를 통해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기존의 블록체인 관련 서비스와 가장 큰 차이점인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껏 부정적인 시각이 쌓여왔던 블록체인 시장에 빠른 분위기 환기가 일어날 것이 기대되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블록체인 플랫폼들이 다시금 시장의 큰 주목을 받고, 빠르게 대안의 화폐로 이용자들에게 유통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준비되고 있는 서비스들은 대부분 실정법의 법망을 뚫고 날개를 펼치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재작년 말부터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던 가상화폐 투기 열풍으로 인해 만들어진 규제안은 여전히 블록체인 관련 사업들의 발목을 쥐고 있으며, 블록체인과 가상화폐 산업을 제도권 안에 안착시키려는 논의는 이어지고 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가상화폐로 인한 피해와 사회적 논란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록체인을 활용한 가상화폐를 이용한 스캠, 다단계 사기는 아직까지도 끊이질 않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자금 세탁의 도구로 가상화폐가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섣부르게 시도되는 규제 철폐는 오히려 겨우 돌파구를 찾은 블록체인 관련 산업을 다시금 실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 상용화에 대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과도기인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의 실패가 다시금 반복되지 않을 수 있도록 관련 산업을 어떻게 보호하고 규제하며 또 키워나갈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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